AI INDUSTRY & K-CONTENTS
독자 AI 모델 개발을 넘어, K-콘텐츠 제작 기술의 주권까지 고민해야 할 때
인공지능(AI)이 영상 제작의 패러다임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
과거에는 수많은 제작 인력과 상당한 비용이 필요했던 영상이 이제는 생성형 AI를 통해 짧은 시간에 구현되고 있다. 촬영하지 않은 공간을 만들어내고, 존재하지 않는 인물을 등장시키며, 복잡한 시각효과까지 구현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 변화는 제작비 절감과 창작 기회의 확대라는 긍정적인 가능성을 보여준다. 자본과 인력이 부족했던 독립영화, 웹드라마, 지역 영상 제작자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변화 속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한국의 영상 창작자들은 AI를 활용해 콘텐츠를 만들고 있지만, 그 콘텐츠를 만드는 핵심 AI 기술은 누가 보유하고 있는가?
그리고 정부의 독자 AI 개발 정책은 이러한 영상 콘텐츠 산업의 구조적 문제까지 충분히 고려하고 있는가?
정부는 인공지능 기술 주권 확보를 위해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2025년 시작된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는 국내 기업들의 AI 개발 역량을 높이고 해외 기술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정책이다. 2026년 2월 정부 발표에 따르면 LG AI연구원, SK텔레콤, 업스테이지 등이 다음 단계에 진출하는 등 국가 차원의 지원과 경쟁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정책은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독자 AI 모델 확보가 곧 영상 생성 AI 기술의 자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영상 콘텐츠 제작에 필요한 AI는 텍스트를 이해하고 생성하는 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인물의 움직임과 표정, 장면의 연속성, 카메라 연출, 조명, 공간 구성, 시각효과, 후반작업 등 영상 제작 전반을 이해하고 구현하는 복합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현재 이 시장에서는 미국의 Google Veo와 Runway, 중국의 Kling과 Seedance 등 해외 서비스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국내에도 AI 영상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과 연구진이 존재하지만, 글로벌 범용 영상 생성 모델 시장에서 한국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국가 AI 경쟁력을 논의할 때는 범용 모델 개발뿐 아니라 영상이라는 개별 산업에서 필요한 핵심 제작 기술을 얼마나 확보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함께 제기되어야 한다.
정부가 AI 영상 콘텐츠 분야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2026년 영화진흥위원회는 AI 기반 영화 제작지원 사업을 장편과 단편으로 구분해 공고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역시 인공지능 콘텐츠 제작지원 사업을 통해 방송·영상 등 여러 콘텐츠 장르와 AI 기술의 융합을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사업들은 창작자들이 새로운 제작 방식을 실험하고 AI 콘텐츠 시장에 진입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문제는 정책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지원사업이 끝난 뒤 무엇이 남는가에 있다.
정부 지원을 받은 제작사가 해외 영상 생성 AI 서비스를 이용해 작품을 완성했다고 가정해 보자.
완성된 영상은 국내 제작사의 성과로 남는다. 창작자는 새로운 기술을 경험하고, 제작비 절감 효과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사용한 핵심 영상 생성 모델은 여전히 해외 기업의 소유다. 제작사는 서비스 이용료를 지불하고, 해외 기업의 가격 정책과 이용 조건에 영향을 받는다.
제작 과정에서 발생한 프롬프트와 영상 생성 기록, 수정 이력 등의 데이터 역시 이용약관과 계약 조건에 따라 해외 서비스에 제공되거나 모델 개선에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해외 AI 서비스를 이용한다고 해서 작품의 저작권이나 IP가 자동으로 해외 기업에 이전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 권리 관계는 계약 조건과 각국의 법률, 인간 창작자의 기여 정도 등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법적 소유권과 산업의 기술적 주도권은 다른 문제다.
핵심 쟁점
한국이 콘텐츠 제작비를 투입하고 창작 경험을 축적하는 동안, 핵심 제작 기술의 경쟁력과 경제적 이익은 해외 기업에 집중되는 구조.
우리가 우려해야 할 것은 단순한 저작권 이전이 아니다. 이러한 산업 구조의 고착화다.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 산업은 오랜 시간 현장 경험을 통해 성장했다.
촬영감독은 빛과 카메라의 움직임을 연구했고, 미술감독은 공간을 설계했으며, 편집자와 시각효과 기술자들은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통해 제작 역량을 발전시켰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기술과 노하우는 다시 한국 영상산업의 경쟁력이 됐다.
그러나 AI 영상 제작에서는 이러한 선순환 구조가 약화될 수 있다.
제작자가 새로운 연출 기법을 개발하더라도 그것이 특정 해외 플랫폼에 종속된 작업 방식이라면 국내 산업 전체의 기술적 자산으로 남기 어렵다.
해외 기업이 서비스 정책을 변경하거나 이용료를 인상하면 제작 환경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AI의 발전이 반드시 국내 제작 노하우의 해외 이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내에 독립적인 제작 데이터 관리 체계와 기술 축적 구조가 없다면, 한국 영상산업은 AI 기술의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로 머무를 가능성이 커진다.
이러한 구조는 장기적으로 K-콘텐츠 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K-콘텐츠의 세계화가 곧 K-콘텐츠 제작 기술의 경쟁력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AI 영상 제작의 확산은 지역 영상산업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기존에는 지역에서 단편영화나 웹드라마 한 편을 제작하더라도 감독과 배우, 촬영팀, 조명팀, 미술팀, 편집자 등이 함께 참여했다.
제작 규모가 작고 수익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현장 경험과 인적 네트워크, 제작 기술이 지역에 축적됐다.
그러나 생성형 AI가 기존 제작 과정을 빠르게 대체하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소수의 제작자가 해외 AI 서비스를 이용해 영상을 완성하는 방식이 확대될 경우, 제작비는 줄어들 수 있지만 지역의 촬영 인력과 후반작업 인력이 경험을 쌓을 기회도 함께 줄어들 수 있다.
지역에서 AI 영상 작품은 늘어나는데 정작 지역의 영상 제작 기업과 전문 인력은 성장하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AI 기술의 활용을 막을 수는 없다. 또한 막아서도 안 된다.
지역 AI 영상 제작의 방향
AI + 사람 + 지역 제작 인프라
기술과 창작자, 지역의 산업 기반이
함께 성장하는 새로운 제작 생태계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AI와 사람, 지역의 제작 인프라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새로운 제작 구조다.
배우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 지역의 실제 촬영 환경은 유지하면서 AI를 사전 시각화, 가상 배경, 시각효과, 후반작업 등에 활용하는 하이브리드 제작 방식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AI를 얼마나 많이 사용했느냐가 아니라, AI를 통해 지역의 제작 역량과 산업 기반을 얼마나 강화했느냐이다.
정부의 AI 영상산업 정책은 한 단계 더 발전할 필요가 있다.
POLICY 01
모든 기업이 거대한 범용 영상 생성 모델을 개발할 필요는 없다.
한국의 영화·드라마 제작 환경에 필요한 인물 일관성 유지, 장면 연결, 한국어 대사와 입 모양 동기화, 촬영 및 후반작업 기술처럼 산업 현장에서 활용도가 높은 분야부터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POLICY 02
영상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콘티, 제작 기록, 작업 방식 등을 권리자의 동의와 적절한 보상 아래 안전하게 관리하고, 국내 연구기관 및 기술기업과 연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창작자의 작품을 무분별하게 AI 학습에 활용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창작자의 권리를 보장하면서 산업 전체의 기술 경쟁력도 높일 수 있는 데이터 활용 체계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POLICY 03
지금까지의 콘텐츠 지원사업이 완성된 작품과 시장 진출 성과를 중심으로 평가됐다면, 앞으로는 제작 과정에서 축적된 기술과 데이터, 국내 기업과의 협업 성과, 향후 재활용할 수 있는 제작 공정까지 함께 평가할 필요가 있다.
POLICY 04
수도권의 대형 제작사뿐 아니라 지역의 소규모 제작사와 독립 창작자, 대학, 국내 AI 기업이 협력해 실제 작품을 제작하고 기술을 검증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지역의 영화제와 영상제 역시 이러한 실증의 장으로 발전할 수 있다.
AI로 제작한 작품을 선정하고 시상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국내 기술을 활용한 제작 실험과 현장 교육, 창작 IP 발굴, 제작 기술의 검증과 확산까지 연결한다면 지역 영상문화 사업은 새로운 산업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한국은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콘텐츠 제작 역량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좋은 이야기를 만들고 뛰어난 영상을 제작하는 능력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그 영상을 만드는 기술을 누가 소유하고,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데이터와 노하우를 누가 축적하며, 산업의 부가가치를 누가 가져가는지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정부의 독자 AI 개발 정책과 콘텐츠 제작지원 정책은 모두 필요한 사업이다.
이제는 두 정책을 연결해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
AI 기술 개발은 기술 개발대로, 콘텐츠 제작은 콘텐츠 제작대로 지원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국내 AI 기업과 영상 제작사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산업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무엇보다 국가 차원의 독자 AI 개발이 실제 영상 제작 현장의 기술 자립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FINAL MESSAGE
우리는 AI로 만든 한국 콘텐츠가 얼마나 늘어나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한국 영상산업에 어떤 기술과 노하우가 남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AI 시대의 K-콘텐츠 경쟁력은 작품의 숫자뿐 아니라 그 작품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우리 자신의 기술과 사람, 제작 생태계에서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AI 영상산업 · K-콘텐츠 정책 · 독자 AI 기술 · 지역 영상 제작 생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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